오랫동안 작업했던 “경혈해설”이 출간되었다. 파일을 정리하다보니 역자 후기로 썼던 글이 있기에 기념으로 남겨본다. 본래 역자 후기로 넣자고 했었는데, 출간된 책에는 역자 서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옛 의서를 보다 보면, 저자가 여러 차례 시험해 보고 효과를 경험한 치법이라는 뜻으로 “累試累驗”이라고 부연한 부분을 볼 수 있다. 이 네 글자를 적어 넣기 위해 책의 저자는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까. 그 이면에 얼마나 많은 곡절이 숨겨져 있을까. 여기에 생각이 이르면 이 네 글자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한의학은 단순한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 장구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쌓아 올린 “累試累驗”의 기록이다. 동아시아에서 질병과 사투를 벌였던 이들의 임상 경험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경험의 다발’이다.
이 책에는 14대째 침의(鍼醫)를 이어가고 있는 후지모토 덴시로오(藤本傳四郞) 렌뿌우(蓮風) 선생이 40년간 임상을 하면서 “累試累驗”한 경험이 실려 있다. 그는 책에 설명된 것이 “전부 하나하나 자신의 손으로, 열심히 땀 흘리며, 시험한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책에는 치료에 대해 그가 했던 고민과 더 나은 치료법에 대한 탐구, 그리고 그 결과 깨달은 방법들이 가득하다. 거침없는 그의 설명은 65만 명의 환자를 보았다는 그의 오랜 임상 경험을 그대로 방증한다.
그가 설명하는 경혈의 크기, 열린 상태, 자침의 느낌은 눈으로 보는 듯 구체적이다. 오랜 시간 손끝으로 관찰하여 얻어진 경지이다. 이를 토대로 저자는 사람들의 질문을 우문(愚問)을 바꾸어 버린다.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치료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침을 환측(患側)에 놓아야 할지 건측(健側)에 놓아야 할지에 대해, 저자는 양쪽 혈자리의 상태를 비교해서 고른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정해진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보이는 대로 관찰된 대로 치료할 뿐이라고. 그의 설명은 의서 속의 이론은 경험을 포괄하기 위한 ‘손가락’일 뿐, 환자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야 말로 의학에서의 ‘달’이자 본질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책의 저자는 독자들에게도 관찰에 기반 한 사유를 요구한다. 그의 설명은 임상 속에서 경혈을 느끼고 치료를 통해 그 변화를 감지해 본 경험이 있는 이에게는 식견을 넓혀 줄 좋은 교재가 될 것이고, 아직 그러한 경험이 없는 초심자에게는 나아가야할 방향을 알려주는 유용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강의를 채록하여 정리한 것이다. 책에는 저자의 말이 구수한 구어체로 서술되어 있고, 수많은 생략과 지시대명사가 사용되어 있다. 또한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손동작으로 모양이나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들이 적지 않았다. 현장의 상황을 생생하게 담으려 애쓴 부분이지만, 현장에 함께하지 않았던 역자들로서는 그 내용을 자칫 잘못 전할까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원작의 취지에 맞게 번역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이러한 연유로 번역상의 오류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다행히 책에는 많은 삽화들이 첨부되어 설명을 돕고 있다. 이를 참고한다면 역자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저자의 메시지가 전해지리라 믿는다.
끝으로 좋은 책을 소개해 주시고 번역을 맡겨 주신 물고기숲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역자를 대표하여 오준호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