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연구는 ‘공부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로 여겨져 왔다. 지금도 그렇다. 다만 다른 것은 외부의 연구비가 투입된다는 점이다. 이공계 뿐만 아니라 인문학 분야에도 연구비 투입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대형 재단이 출자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연구비의 출처는 주로 국가이다. 따라서 국가의 R&D 기조에 따라 연구비가 움직이고, 이에 따라 연구 지형이 급격히 바뀌기도 한다.
연구비를 주는 측에서는 연구비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지 감시하고 싶어 하며 가성비(?) 높은 결과가 나오기를 원한다. 반대로 연구비를 받는 입장에서는 행정처리를 줄이고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 이 두가지는 종종 충돌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어 보자.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연구비를 통해 연구의 대형화 집단화는 가속화 되고 있지만, 의외로 결과 없이 끝나는 과제가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구과제를 수행할 때 양 날개(기획과 실행) 가운데 기획의 중요성을 간과한 결과이다. 이에 대해 몇 자 적어 본다.
기획은 구체적인 계획이다.
최근 ‘오션스 일레븐’이라는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팀 리더인 오션을 중심으로 11명이 모여 기발한 방식으로 카지노를 터는 내용이다. 이런 범죄 영화들을 보면, 팀 리더가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천재적인 아이디어로 설계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을 모아 이를 실행하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이때 팀의 리더는 주로 범죄 계획을 수립한 사람이 하게 된다.
연구과제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과제에서 기획이 절반이고 실행이 나머지 절반이다. 그리고 기획을 하는 사람이 그 과제를 이끌어 가야 한다. 기획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 늘 그렇지는 않지만 말이다. 연구논문에서 연구를 기획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이유이다.
기획이 중요하다는 점에 이의가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기획은 사실 좀 다르다. 기획에서 중요한 것은 구체성이다. 즉, 실천 가능한 “계획”이어야 한다. 당연한 말 아니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많은 연구과제들이 추상적인 기획만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기획의 사례
기획이 되지 않은 것은 아무런 계획 없이 카지노를 털자고 하는 말과 같다. 하지만 이런 연구과제들이 의외로 많다. 대부분의 연구과제는 실행이 힘들어서 좌초한다기 보다는 기획이 잘 되지 않거나 적절하지 못해 실폐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는 실폐한 연구과제는 거의 없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많은 과제가 결과 없이 마무리 된다.
전형적인 상황을 들어 보자. 연구를 해야 한다는 ‘당위’만을 가지고 연구비를 받아 연구과제가 시작되는 경우이다.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서는 연구를 수행해야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해야 하는 연구와 할 수 있는 연구를 구분하는 심사자는 별로 없다. 그래서 정직한 과제 보다는 잘 포장된 과제에게 연구비가 주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규모가 큰 과제일 수록 기획의 문제가 많은 이유이다.
아무튼 이렇게 연구비가 지원되어 연구과제가 시작되면 문제가 생긴다. 연구책임자는 연구비로 사람들을 모아 놓으면 기획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반면 프로젝트에 모이는 사람들은 연구책임자가 무언가 기획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연구책임자는 실무자들을 계속 푸시하지만, 실무자들은 애초에 내가 생각한 과제가 아니므로 그 일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굳이 꺼내지 않는다. 나중에 내 과제를 할 때 써야할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장 중요한 기획이 부유하다가 시간이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당신 주변에도 술자리에서 자기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니 특허를 내 보라는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좋은 아이디어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술자리 아이디어는 현실화 되지 못하는 것인가. 왜 그들은 직접 특허를 내지 않고 나에게 내라는 것일까. 그것은 아이디어가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봄면, 자동차가 땅을 달리다가 하늘도 날고 물 속도 항해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류의 아이디어이다.
연구에서 기획은 “무엇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에 대한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기획들이 전자만 있고 후자가 없다. 기획은 구현이 가능할 정도로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선언’일 뿐이지 ‘기획’은 아니다. 얼핏 보면 구체적인 듯 보여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팀원들 머리속에서 그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획이 안된 것이다.
마치며
기획은 그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획이 잘 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획이 잘 되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모르거나 그것을 부정한 상태로 일이 흘러가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문제가 되풀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성과의 함정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과에 이름이 들어 갔는가가 중요하다. 얼마나 큰 과제의 과제책임자를 했는가. 거기서 나온 논문에 누구의 이름이 들어갔는가가 중요하다. 기획은 초기에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여가 희석될 수도 있고,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무시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상적으로 기획은 과제책임자가 직접 해야 하는 일이고 과제책임자가 될지 여부를 가리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범죄 영화에서 팀 리더는 따로 있고 범죄 계획을 짜고 사람들을 모으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그럼 팀 리더는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물론 현실에서는 대외활동을 통해 과제비를 따온다거나 연구자들을 조율하고 연구를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과제책임자들도 존재한다. 이런 경우라면, 기획에 참여하거나 중요한 실천 계획을 제공한 사람에게 많은 공이 돌아가도록 연구팀 내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과제책임자가 이를 보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