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논문의 요건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연구 논문들을 보게 된다. 한의학에서 원전이나 의사학 분야의 논문들이다. 때로는 동료 심사를 하기도 하고 심사를 받기도 한다. 이때 종종 이 분야에서 논문의 요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에 논문의 요건에 대한 내 생각을 남겨 본다.

이 글에서는 원전이나 의사학 논문으로 한정한다. 이는 분야마다 학술적인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하의 내용은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학술활동이 수행되는 분야에 어느정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논문의 요건

논문은 나만 읽는 글이 아니고 동종 분야 연구자들에게 내가 이런 연구를 했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목적이 있다. 원래 ‘저널’은 같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끼리 관심사와 생각을 교류하기 위한 말 그대로 ‘잡지’였다. 아마 초기 저널 창간자들은 나중에 이렇게 권력을 가진 매체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논문은 이른바 학계라고 하는 동종 분야 연구자 집단에 기여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논문심사 항목에 여러가지 기준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술 단체에서 “학계 기여”를 기준으로 넣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계에 기여하는 논고는 어떤 것일까. 아마 다음 중 하나에 해당되는 내용이라면 그렇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1. 학계의 통념(혹은 선행연구)를 강화해 주는 논문
  2. 학계의 통념(혹은 선행연구)를 반박하는 논문
  3. 학계의 암묵지를 구체화 하여 암묵지의 근거를 마련한 논문
  4. 학계의 암묵지가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논문
  5.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혹은 영역)을 지적하고 그 중요성을 환기하는 논문

사람의 생각란 이전 생각을 바탕으로 할 수 밖에 없다. 한 개인이 가진 새로운 생각도 사실 이전의 지식과 아이디어를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하기 힘들다. 논문의 경우에는 ‘학계의 지식’이 그것에 해당한다. 논문은 학계에 기여하는 글이므로 ‘학계의 지식’이 전제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학계의 지식’이라는 것은 모호한 측면이 있다. 중심부는 명확히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로 이루어져 있지만, 주변부로 가면 논쟁의 범주에 해당하는 영역이, 더 밖으로 나가면 아무것도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먼저 학계에서 이미 받아들여 지고 있는 사실 혹은 이론과 관련해서는 1번과 2번에 해당하는 논문을 쓸 수 있다. 이미 학계에서 받아지고 있는 지식을 더 공고히 발전 시키거나, 혹은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논문이다.

학계에는 특별한 고찰 없이 암묵적으로 그렇다고 여겨지는 지식들이 있다. 앞의 것과 다른 것은, 이에 대한 연구 결과나 이를 뒷받침할 자료를 찾으려 하면 그다지 없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추론이 가능한 것이나, 많은 연구자들이 사료 속에서 대체로 그렇게 느꼈던 것, 또는 그 분야 원로 학자가 주장하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그런 “암묵지”가 된다. 하지만 이런 암묵지는 제대로 검증된 적이 없다. 따라서 검토를 통해 학계의 통념으로 발전시켜 주어야 한다. 4번과 5번 같은 논문들은 이러한 점에서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학계에서 전혀 관심이 없거나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이나 이론도 있다. 이런 경우도 당연히 새로운 지식의 발전을 도모한 것이기 때문에 논문이 된다. 5번이 그러한 것이다.

애매한 경우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논의를 전개할 때, 연구자가 제시한 별다른 지견 없이 단순히 사료에 적힌 내용을 주제별로 모으거나 순서를 바꾸어 정리하는 글의 경우 논문으로 자격이 있는지 애매한 경우가 있다. 이런 글은 보통 “레포트”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이런 글은 사료만 눈에 띄고 결론이 모호하다. 무언가 있을 줄 알고 자료를 정리했는데, 결론을 낼 수 없었던 저자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저자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분명 사료를 모아 정리하는 것 자체가 논고가 되기는 어렵다. 이미 사료에 서술된 사실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은 사료에 대한 분석과 고찰, 그를 통해 도출된 결론, 즉 저자의 학술적 지견이 포함되어 있어야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몇가지 예외가 있다. 분명 사료 속에 분명히 기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학계에서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경우이다.

  1. 새로 발견된 사료의 내용을 소개하거나 그 내용을 근거로 한 경우
  2. 다종의 사료를 복합적으로 검토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을 제시한 경우
  3. 비교적 대량의 사료를 추상화 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을 제시한 경우

위와 같은 경우라면 비록 사료의 내용을 소개하는 정도라 하더라도 논고로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1번은 새로운 사료를 보고하는 것으로 신규성이 있기 때문에 논문으로 인정된다.

2번과 3번의 경우는 이미 사료에 적힌 내용을 정리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누구나 동일한 사료를 본다면 저자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이 투여되어야 한다면, 이를 정리하여 다른 연구자의 노력을 줄여주는 것도 학계에 기여하는 일이다.

다만, 오늘날과 같이 학술DB가 발달한 경우에는 이에 대한 기준이 좀더 엄격해야 한다. 과거에는 자료를 모으는 것 자체가 많은 노력이 투입되는 학술 활동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학술DB에서 몇가지 키워드로 검색되는 내용만으로 논고를 꾸몄다면 이는 학술 활동으로 인정하기 어렵다.